본문 바로가기

한국 근현대사/산업화와 민주화의 시대 (1960~1999년)

(10)
1990년대 조폭과 정계의 유착 1. 1990년대 한국 사회, 혼돈 속에 자리 잡은 조직폭력배1990년대 한국은 격변의 시기였다. 군사 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주화가 자리 잡아 가던 이 시기에는 경제 성장과 함께 정치·사회적 변화가 급격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이 혼란을 틈타 조직폭력배(이하 조폭)들이 더욱 은밀하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되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조폭은 주로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폭력 조직에 머물렀으나, 1990년대를 기점으로 점차 경제 및 정치 영역까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이 시기의 조폭은 과거처럼 단순한 폭력 행사와 갈취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일부 조직은 기업 형태를 띠며, 나이트클럽·카지노·유흥업소·건설업 등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를 통해 불법적인 수익을 올리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
IMF 외환위기의 진짜 원인 1. 외환 부족이 불러온 위기 – 국가 신용 위기의 시작IMF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외환보유고의 급격한 감소였다. 1997년 당시 한국 경제는 고도성장을 지속하고 있었지만, 이에 비해 외환보유고는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이는 한국 경제가 외국 자본에 과도하게 의존했음을 의미했다. 당시 정부와 기업들은 막대한 외채를 바탕으로 성장 전략을 펼쳤고, 은행과 금융기관은 단기 외채를 대거 도입하여 기업들에게 자금을 공급했다. 문제는 이러한 자금이 생산성 향상을 위한 투자보다는 부동산 및 비효율적인 사업 확장에 사용되었다는 점이다.또한, 태국에서 시작된 아시아 금융위기가 한국으로 확산되면서 외국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에서 급격하게 이탈하기 시작했다. 해외 자본이 빠져나가자 한국 정부는 외환보유고를 동원해 이를 ..
한국 사회의 안전불감증 1. 부실공사의 시작, 예견된 비극1995년 6월 29일,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인재(人災)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502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9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이 사고는 단순한 불운이 아니라, 애초부터 예정된 비극이었다. 삼풍백화점은 원래 백화점이 아닌 아파트형 공장으로 설계되었으나, 무리한 변경을 통해 5층짜리 백화점으로 탈바꿈했다. 설계 변경 과정에서 구조적 안전성이 무시되었고, 건물의 하중을 견디기 어려운 상태에서 무리한 확장이 이루어졌다.특히 삼풍백화점의 붕괴 원인은 부실공사와 무리한 설계 변경에서 시작되었다. 건설 과정에서 철근 사용량이 설계 기준보다 절반 가까이 줄었고, 콘크리트의 강도 또한 현저히 낮았다. 더 심각한..
1991년 강경대 열사 사망 사건과 학생운동의 변화 1. 강경대 열사 사망 사건과 시대적 배경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강경대 열사는 학교 인근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의 강경 진압 과정에서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 후 숨졌다. 이 사건은 당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던 학생운동이 다시 격렬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90년대 초반은 노태우 정부의 ‘3당 합당’(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이후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꺾이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실망과 분노가 퍼져가던 시기였다.당시 한국 사회는 군부 독재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상황이었다. 하지만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었으며, 경찰의 강경 대응과 공권력 남용은 ..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1.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과 군 투입의 배경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 진행된 광주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국가 폭력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당시 신군부(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는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한 후,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정권 장악을 시도했다. 이에 맞서 대학생과 시민들은 민주주의 회복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이에 대해 신군부는 계엄군을 투입해 강경 진압을 지시했다.광주에서는 제7공수특전여단, 제11공수특전여단, 제3공수특전여단 등 특전사 부대가 투입되어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폭력을 행사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폭행하고, 여성과 노인을 포함한 시민들을 구타했으며, 심지어 실탄..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 이면 1.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산업화의 빛과 그림자박정희 정권(1961~1979년)은 한국 경제 성장의 기반을 다진 시기로 평가된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산업화를 가속화했고,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 주도형 경제 모델을 통해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특히, 1970년대 들어 정부는 철강, 조선, 전자, 석유화학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면서 한국 경제는 연평균 1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했다.그러나 이러한 경제 성장은 노동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노동 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산업재해는 일상적으로 발생했다. 정부는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들의 권리를 철저히 통제했으며,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강요했다. 공장은 안전장치가 미..
1970년대 긴급조치 1. 긴급조치의 배경과 시대적 상황1970년대 대한민국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던 시기였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기존의 헌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헌법을 도입하는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언했다. 이를 통해 대통령은 장기 집권이 가능해졌으며, 국회 해산권과 법률 정지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국민의 기본권은 크게 제한되었으며, 정치적 반대 의견을 억누르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되었다.이러한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이 바로 ‘긴급조치’였다. 긴급조치는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 제53조를 근거로 발동한 특별 조치로, 국가의 안보와 공공 질서를 명목으로 헌법보다 우선하는 법적 효력을 가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정부 세력을 탄압하고 국민..
베트남전 참전 1.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배경과 군사적 성과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미국과의 군사적 동맹을 강화하고, 경제적 지원을 얻기 위한 중요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당시 한국군은 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를 중심으로 약 32만 명이 파병되었으며, 이는 미국 이외의 국가 중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규모였다.한국군은 베트남에서 다양한 작전을 수행하며 강력한 전투력과 전술적 우위를 증명했다. 특히, 게릴라전이 주를 이루었던 베트남 전장에서 한국군은 정글전에 특화된 전술을 활용하여 미군이 감당하지 못한 지역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현지에서 기반 시설 건설과 의료 지원 등의 활동을 병행하며 베트남 지역 사회에도 기여한 바 있다.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