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근현대사/일제강점기와 독립운동 (1910~1945년)

일제강점기 노동자들의 저항

1. 일제강점기, 조선 노동자와 농민의 고통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일본은 조선을 단순한 식민지가 아닌, 일본 경제를 뒷받침하는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농민과 노동자들은 혹독한 수탈과 억압 속에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조선 농민들은 일본인 지주와 친일파 대지주의 탐욕에 의해 극심한 착취를 당했다. 소작농들은 경작한 곡식의 50~70%를 지주에게 바쳐야 했고, 거기에 각종 세금과 부당한 추가 징수까지 감당해야 했다. 게다가 자연재해로 인해 수확이 줄어들어도 소작료는 그대로 내야 했으며, 이를 감당하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땅을 빼앗기고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도시의 노동자들 역시 일본 기업과 조선 총독부의 탄압 속에서 혹독한 노동 환경에 처해 있었다. 12~16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렸으며,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또한 노동자들은 열악한 주거 환경과 강제 노역에 내몰리며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이러한 억압적 구조 속에서 조선의 농민과 노동자들은 점차 단결하여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23년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에서 일어난 ‘암태도 소작쟁의'였다.

일제강점기 노동자들의 저항

2. 암태도 소작쟁의, 조선 농민의 조직적 저항

1923년, 전라남도 신안군의 작은 섬 암태도에서 한반도 소작쟁의 역사상 가장 조직적이고 성공적인 투쟁이 일어났다. 당시 암태도의 농민들은 지주 문재철이 부당하게 높은 소작료(70%)를 요구하며 극심한 착취를 자행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농민들은 이러한 부당한 착취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결국 조직적인 저항을 결심하게 된다.

소작농들은 1923년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하고, 문재철과 그의 관리들에게 소작료 인하를 요구했다. 하지만 지주는 이를 거부하며 탄압을 가했고, 소작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에 농민들은 소작료 납부 거부 운동을 전개하며 본격적인 장기 투쟁에 돌입했다.

지주는 소작농들이 농사짓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일본 경찰을 동원해 탄압을 가했다. 일부 소작농들은 체포되거나 폭력적인 탄압을 받았지만, 농민들은 단결을 유지하며 굴복하지 않았다. 특히 암태도 소작쟁의는 단순한 지역적 저항이 아니라, 전국적인 연대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전국의 언론과 독립운동가들이 암태도 소작쟁의를 주목했고, 일본의 억압적 식민정책을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노동운동가와 민족운동가들도 농민들에게 지원을 보내며, 이 투쟁이 단순한 생존권 투쟁이 아닌, 식민지 경제 착취에 맞선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왔다.

 

3. 암태도 소작쟁의의 승리와 노동운동의 확산

암태도 소작쟁의는 무려 1년 4개월 동안 지속된 장기 투쟁이었다. 일본 경찰과 지주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단결력을 유지했고, 결국 1924년 지주는 소작료를 기존 70%에서 40%로 인하하는 조건을 수락하면서 투쟁은 농민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승리는 단순한 경제적 성과가 아니었다. 암태도 소작쟁의 이후, 조선 전역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의 저항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암태도에서 승리한 소작농들은 다른 지역 농민들에게 조직화와 연대의 중요성을 알렸고, 이후 각지에서 비슷한 형태의 소작쟁의가 발생하게 된다.

특히 이 사건은 도시 노동자들의 투쟁과도 연결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 기업의 착취에 맞서 노동자들이 파업과 노동쟁의를 조직하고 있었고, 암태도 소작쟁의의 승리는 노동자들에게도 큰 용기를 주었다. 이후 1929년 광주학생운동, 원산 노동자 총파업 등 노동자와 농민이 함께하는 전국적 저항 운동이 확산되었다.

또한 암태도 소작쟁의는 단순한 경제적 투쟁을 넘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발과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암태도의 승리는 단순한 소작료 인하가 아니라, 조선 민중이 일본과 친일 지주의 억압을 조직적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4. 암태도 소작쟁의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암태도 소작쟁의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을 주는 역사적 사례이다.

첫째, 연대와 조직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암태도 농민들은 단순한 개별 저항이 아닌, 조직적인 연대를 통해 하나의 강력한 집단으로 싸웠다. 노동자와 농민이 단결하여 조직적인 행동을 할 때, 억압적인 권력에 맞서 승리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둘째, 부당한 착취와 억압에 대한 저항 정신이다. 당시 조선 농민들은 일본과 지주의 극심한 착취 속에서도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이는 오늘날 노동자들이 불합리한 노동 조건에 맞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셋째, 장기적인 투쟁과 인내의 필요성이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단기간에 끝난 싸움이 아니었다. 1년 4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농민들은 탄압과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싸웠다. 이는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적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넷째, 과거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노동자와 농민이 단결할 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중요한 사례이다. 오늘날에도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 공정한 경제 질서 확립, 불합리한 구조 개선을 위해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다.

 

5. 암태도 소작쟁의, 저항의 역사 속에서 되새겨야 할 유산

암태도 소작쟁의는 단순한 농민들의 경제적 싸움이 아니라, 조선 민중이 식민지 수탈 구조에 맞서 조직적으로 저항한 중요한 사례였다. 이 투쟁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독립운동과 민권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암태도 소작쟁의에서 배운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부당한 착취와 억압이 계속되는 한, 노동자와 민중의 단결된 저항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암태도의 농민들이 보여준 용기와 단결력은 지금도 우리 사회의 정의와 공정을 위해 필요한 정신이며, 이를 기억하고 계승하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