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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일제강점기와 독립운동 (1910~1945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1. 무장 독립운동의 본격화, 봉오동과 청산리로 향하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의 독립운동은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만주 지역에서는 한인들이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력 항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1920년이 되면서 본격적인 무장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전투가 바로 **봉오동 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 전투(1920년 10월)**였다.

봉오동과 청산리는 모두 만주 지역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독립군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에 유리한 지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은 만주 지역의 독립군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하지만 독립군은 뛰어난 전술과 지형을 활용한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연이어 격파하며 조선 독립운동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두 전투의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한민족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통해 일본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역사적 사건이었다. 또한, 이는 국제사회에 조선 독립운동의 존재를 강력하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독립군의 전술과 전략이 더욱 발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2. 봉오동 전투, 독립군이 만든 첫 승리의 기적

1920년 6월 7일, 독립군 부대는 만주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역사적인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이 연합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펼친 첫 대규모 승리였다.

봉오동은 산악 지형이 많아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이 움직이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군 지도자들은 이를 활용하여 일본군을 유인한 뒤 기습 공격을 감행하는 전략을 세웠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추격하다가 봉오동 계곡으로 유인되었고, 이곳에서 독립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봉오동 전투의 결과, 일본군은 약 157명 이상 사상자를 내며 크게 패배하였고, 독립군의 사상자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는 독립군이 체계적인 전술과 지형을 활용한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였다. 이 승리는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고, 이후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을 더욱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리의 배경과 이후 독립군의 운명

 

3. 청산리 전투, 독립군 연합부대의 압도적 승리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더욱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만주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독립군은 청산리 지역에서 결사항전을 벌이게 되었고,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다.

청산리 전투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과 맞서 싸운 대규모 전투였다. 일본군은 2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압박했지만, 독립군은 기습과 유격전을 적절히 활용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대표적인 전투로는 백운평, 완루구, 천수평 전투 등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1,2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반면, 독립군은 약 100여 명의 희생자를 내는 비교적 적은 피해를 입으며 승리를 거두었다. 청산리 전투는 단순한 독립군의 승리가 아니라, 전략적 전술과 독립군의 뛰어난 조직력이 일본군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4. 간도참변과 독립군의 혹독한 시련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연이은 패배를 당한 일본군은 보복을 결심하고, 무차별적인 탄압 작전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1920년 10월 말부터 12월까지 **간도 지역에서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간도참변(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간도 지역의 조선인 마을을 습격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하고 가옥을 불태웠다. 이 과정에서 약 3,500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희생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간도참변으로 인해 독립군은 더 이상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령 연해주로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도 독립군은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 내전이 진행 중이었고, 소련 적군과 백군 사이에서 독립군이 이용당하며 분열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일부 독립군은 소련군에 의해 해산되거나 흩어졌고, 다시 만주로 돌아와야 했다. 이는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이 이후 지속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5. 봉오동·청산리 전투 이후, 독립군의 새로운 길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은 일본군의 보복과 탄압으로 인해 지속적인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조직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무장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1922년에는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하여 대한통의부를 조직했고, 이후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군 활동을 지속했다. 또한 1925년에는 신민부, 정의부, 참의부가 결성되면서 독립군의 조직적 기반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이후 1930년대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이 된 한국독립군, 조선혁명군, 동북항일연군 등의 전신이 되었다.

특히 194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면서 독립군의 전통이 이어졌고, 광복군은 연합군과 협력하여 조국 독립을 위한 전쟁을 계속 준비했다.

이처럼 봉오동·청산리 전투는 단순한 전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대규모 승리를 거둔 최초의 사례였으며, 이후 항일 독립운동이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이 승리를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그들의 정신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