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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개항기와 대한제국의 몰락 (1890~1910년)

105인 사건의 진실: 일제가 조작한 항일 독립운동 탄압극

1. 105인 사건, 일제의 대표적인 탄압 공작

1911년 조선 총독부는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무자비한 탄압 정책을 시행했다. 그중에서도 ‘105인 사건’은 일제가 항일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도 항일 의거가 확산될 것을 두려워한 일본이, 조선 내 독립운동 조직을 뿌리 뽑기 위해 날조한 것이다.

105인 사건은 당시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기독교계 독립운동 세력을 표적으로 삼았다. 1910년 한일병합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직후, 조선 내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하면서 특히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조직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조선총독부는 평양 지역의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을 무더기로 검거하며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이 사건은 1911년 9월, 평양에서 일본 경찰이 독립운동 혐의로 한 기독교인을 체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체포된 인물들의 자백을 강요하며 조작을 거듭한 끝에, 일제는 총 105명의 독립운동가를 반역자로 몰아 법정에 세웠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무고한 민간인이었으며, 독립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도 많았다. 결국 105인 사건은 명백한 일제의 조작극이었고, 이를 통해 일본은 조선 내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고자 했다.

2. 평양 기독교계를 겨냥한 일제의 탄압 전략

105인 사건은 단순한 탄압이 아니라, 조선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기독교계를 말살하기 위한 일본의 교묘한 전략이었다. 당시 기독교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근대적 교육과 독립사상을 퍼뜨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기독교 신도가 많았고,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기독교계가 독립운동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고, 조직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105인 사건이 터지자, 일본 경찰은 평양 지역의 주요 교회를 급습하고 목사, 교사, 청년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이들은 고문과 협박을 당하며 반역 혐의를 뒤집어썼고, 일부는 허위 자백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특히 사건의 핵심 인물로 몰린 길선주(吉善宙) 목사는 평양 대부흥 운동을 주도하며 조선 민중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일본은 그를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있다는 허위 사실을 만들어내고, 이를 구실로 대대적인 탄압을 감행했다. 결국 105인 사건은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제거함으로써 조선의 독립운동 조직을 와해시키려는 일본의 치밀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3. 일제가 조작한 허위 증거와 강제 자백

105인 사건이 날조된 사건이라는 사실은, 당시 재판 과정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일본은 이 사건을 조선인들이 계획한 대규모 독립운동 음모로 포장하기 위해, 허위 증거를 조작하고 강제 자백을 유도했다.

일본 경찰은 체포된 인물들을 고문하며 가혹한 심문을 진행했다. 특히 수사 과정에서 ‘105명’이라는 숫자가 먼저 정해졌다는 점은 이 사건이 철저히 계획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일본 경찰은 특정 인물들에게 협박을 가하며 "너는 이미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이 밝혀졌다. 다른 동료들의 이름을 대지 않으면 처벌이 더 무거워질 것이다"라는 식으로 강요했다. 결국 고문을 견디지 못한 일부 인물들이 허위 자백을 하게 되었고, 이를 근거로 105명의 명단이 조작되었다.

재판에서도 일본은 공정한 절차를 무시했다. 피고인들의 변호권은 철저히 제한되었으며, 증거라고 제출된 문서들은 대부분 일본 경찰이 날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당한 재판에도 불구하고 국제 사회에서는 이 사건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고, 특히 서양 선교사들과 미국 기독교 단체들은 105인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일본 정부에 항의하기도 했다.

105인 사건의 진실: 일제가 조작한 항일 독립운동 탄압극

4. 국제 사회의 반응과 조선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105인 사건이 일본의 조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제 사회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다. 특히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기독교 단체들은 조선에서의 기독교 탄압에 강한 반발을 보였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억울하게 투옥되었음을 주장하며, 일본 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했다.

또한 일본의 이러한 탄압은 조선 내 독립운동 세력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105인 사건 이후, 일본이 조선 내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무고한 시민까지 체포하고 가혹하게 처벌할 수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면서, 독립운동가들은 더욱 신중한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따라 비밀 결사 조직이 더욱 활성화되었고, 독립운동의 방식도 점차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105인 사건으로 인해 기독교계가 탄압받으면서, 조선 내 기독교 단체들은 더욱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105인 사건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5. 105인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교훈

105인 사건은 단순한 독립운동 탄압 사건이 아니라, 일제가 조선을 통제하기 위해 어떻게 조직적인 공작을 벌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사건을 통해 일본은 조선 내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억누를 수 있었지만, 동시에 국제 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늘날 105인 사건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인들이 어떤 억압을 받았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또한, 허위 조작과 강압적인 탄압 속에서도 독립을 위해 싸웠던 조선인들의 희생과 용기를 기억해야 한다.

이 사건은 단순한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독립과 정의를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우리는 105인 사건을 통해 진실을 왜곡하는 권력의 위험성을 깨닫고, 역사 속에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105인 사건은 단순한 조작극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운동을 더욱 강하게 만든 촉매제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